겨울 거울 사진


 

1.

난 바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하지만 한 편으로는 마음이 놓입니다. 이 세상에 나의 말이 스며들 곳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운전자 없는 빈 자동차들이 도로를 달리는 밤이었습니다. 세상이 통째로 얼어붙으니 왠지 거울 속 같네요. 깨질 듯 위태해 보이지만 거울의 안에서는 이 거울을 깰 수가 없어요. 사람들과 멀어져서 다시는 관계 맺을 수 없다는 느낌이 하루 종일 듭니다. 사람들은 무덤 같은 집에서 잠을 자고 있겠지요. 어느 만취자 하나만 간신히 깨어 도로를 휘청대고 있네요. 그 풍경 뒤로, 천 년 산 거 같은 여자 하나가 얼음의 거울 속을 걷고 있습니다. 뒤통수에서 클랙슨이 비명을 지르네요. 하지만 그녀는 하나도 놀라지 않는군요. 그 경적 소리는 이 꿈을 더 정교하게 하는 꿈속의 소리일 뿐.

 

2.

그녀는 어떤 소리도 거울 밖으로 새어나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겨울이 거울 속에 맺혔는지 거울이 겨울 속에 맺혔는지조차 알 수 없다. 이 거울 밖으로 나가는 문은 어디에 있을까. 요새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지는데 어쩜 그 하얀 가루들이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는 스위치 같은 건 아닐까? 그녀는 저 심드렁한 경적소리를 아쉬워하며 차라리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봐요. 삶이 간지러워요. 거울 밖에서 누가 잠든 나를 좀 긁어줘요. 그녀는 걷다 말고, 편의점 유리창에 비치는 자신을 바라본다. 그녀는 문득 그를 떠올렸다. 그녀의 한때를 공유했던, 그러니까 이 세계가 거울 속에 갇히기 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 그녀는 오랜 세월 그를 마음 깊이 여겼지만 이제 그녀만 홀로 이 세계를 서성인다. 그녀가 그를 처음 만난 것도 겨울이었다. 기상청 통계를 보면 지금과 별 다를 것도 없는데, 그때는 왜 그리 추웠을까? 조금만 걸어도 몸이 얼어붙곤 했다. 그는 유독 추위를 많이 타는 사람이었다. 남들이 보면 좀 우습겠지만 그녀는 자주 자신의 빨간 목도리를 풀어 그에게 매어주곤 했다. 참 희한하지, 그 시절에는 뜨개질들도 많이 했는데 왜 그는 늘 목도리 하나 없이 겨울을 보냈을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다 그에게 목도리 선물 하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녀는 며칠 전 그를 만난 적이 있다. 그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였다. 그는 반듯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학창시절의 그가 가졌던 세상에 대한 불화의 느낌은 다 일소되고,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마저 건전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 거울 속에서 그를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다만 거울에 비친 풍경 이상 그 무엇도 아니었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마음이 아팠다. 자신 쪽과 안쪽이 반씩 정도 비치는 편의점 유리창에 대고 그녀는 그에게 들리지도 않는 이야기를 건넨다. 어쩌면 이건 그녀가 아니고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소리였을까? 이 세계의 끝에서 들려나오는 듯한 이야기가 허공에 퍼진다.

나는 꿈을 깨어나려 할수록 그 꿈을 포함하는 더 큰 꿈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기분이 들어. 하지만 이건 어쩌면 나의 꿈속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야. 여기는 혹 너의 꿈속이 아닐까? 그나저나 당신, 유기농 채소나 사다 먹는 운동권 찌끄레기처럼 살지 말고 화끈하게 좀 살아봐. 다른 꿈들은 다 어디 간 거야? 당신 삶이 그 지경이니 당신 꿈속이 이리 썰렁하잖아. 그렇다고 너무 화끈하게 살진 마. 이 겨울은 그대로인 채 나만 옷 벗고 다니는 건 싫으니까. 그 겨울 생각나? 시위를 마치고 수색역 앞에서 기계우동 사먹던 날 말이야. 그날 선배 하나가 체포되어 소식이 영영 끊겼잖아. 역전 광장에는 웬 미친 여자가 옷 벗고 뛰어가고 있었지. 그때 우동은 목구멍에 넘어가지도 않았는데 그 미친 여자나 잘 볼 걸 그랬어. 어쩜 그게 지금의 나 아니었는지. 아 이젠 그만 헤매고 시멘트 바닥에 얼굴이라도 긁고 싶다. 그래봐야 이 거울 속에서는 영혼에 기스 한 줄 안 나겠지만 내 몸에 그만한 피 칠갑이라도 해야 잠을 잘 수 있을 거 같아. 나는 명랑한 여자였잖아. 하지만 나는 이제 너무 자주 나를 해치고 싶어져. 그나저나 어느새 당신 출근할 시간이로군. 어서 일어나. 자고나도 꿈속일 테지만 나도 이제 좀 집에 가서 자야겠다. 그래도 다행이야 이 시간에도 비듬 샴푸 살 수 있는 24시간 편의점이 있는 꿈속이라서. 나란 여자의 슬픔 참 재치 있지? 슬퍼진다. 더 이상 추위를 잃은 당신 대신, 길가에 서 있는 전봇대에 내 빨간 목도리를 매준다.

그래도 당신과 내가 굿모닝 굿나잇.

 

3.

나는 그녀가 편의점 앞을 떠난 후 그녀가 전봇대에 매어둔 빨간 목도리를 풀어 내 목에 걸어봅니다. 못 믿을 일이겠지만 그녀의 온기가 조금 남아있네요. 이건 어쩌면 아름다울 수도 있었던 이야기일까요?

나는 다음날도 그리고 그 다음 날도 매일 밤마다 그 편의점으로 갔습니다. 편의점은 신기한 곳입니다. 깊은 밤 사람을 배고프지 않게 해주지만, 목구멍이 델 만큼 뜨거운 라면 국물조차도 제 온도로 느껴지지 않아요. 그곳에 있는 먹거리들에 적힌 칼로리 표시를 보고 있자면, 정말 그 숫자만큼 내 안에서 열량이 발생할지 의심스럽지요. 칼로리 표시 역시 이 세계의 환상이지 않을까요?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도 살이 찌지 않았던 때가 있거든요. 가령 고향에 내려가면 어머님이 해주시던 갈비찜이라든가, 오지에 혼자 사는 할매가 한 솥 가득 해주던 곤드레나물밥이라든가. 이 편의점 안은 뭔가 거대한 냉장고 속 같아요. 그나저나 그녀는 왜 다시 이 편의점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설마 며칠 동안 계속 잠을 자고 있는 걸까요? 어쩌면 그녀가 사랑했던 그 남자가 그녀의 꿈 밖에서 며칠째 잠도 안 자고 야근을 하고 있는 걸까요? 만약 그렇다면 혹이라도 그 남자가 과로사로 갑자기 쓰러지게 된다면 그녀는 이 세계에서 영생을 하게 되는 걸까요?

캔커피를 사들고 계산대에 섰을 때, 그녀가 편의점 유리창 앞에 서서 이쪽을 초점 없이 바라보고 있네요. 계산을 마치고 유리문을 열고 나오는데 문에 달린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하고 울립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뭔가에 호출당한 사람처럼 얼굴을 돌려 이쪽을 바라보네요.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칩니다. 목도리가 없는 그녀의 목이 너무 차가워 보이네요. 나는 그녀 앞으로 걸어가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그녀를 빤히 바라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나를 현실성 있게 바라보는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가방 속에 넣어두었던 그녀의 빨간 목도리를 꺼냅니다. 그리고 손에 든 채 잠시 서 있습니다. 낯선 내가 그녀 목에 그것을 걸어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그녀는 한동안 내가 들고 있는 자신의 목도리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나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몸서리가 쳐지네요. 나는 갑자기 한겨울을 느낍니다. 거울 속에 갇힌 겨울의 바깥으로 문득 던져진 것 같네요. 그녀가 바라보고 있어서 몸에 힘을 줘보는데도 부들부들 떨리네요. 그때였어요, 그녀가 자신의 손을 허공에 들어 마치 우주의 수화라도 하는 듯 움직입니다. 나는 움찔움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파닥입니다. 그것은 정전기였어요.

그리고 내 목에 그 빨간 목도리가 감겨져 있네요.

놀란 눈을 하고 있는 나에게 그녀가 말했어요.

 

난 바로 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지가 않아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

 


 

 

걸어둔 음악은 어느 무명인이 부른 Beast in me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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